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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온정 이야기

[자투리경제] "촌스럽게 이런 선물을"…온전한 용서란?

 

 

내가 젊었을 때다. 명절이 되면 선배 교수님께 인사하러 두루 다닌다. 나는 그 때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해 선물을 무엇으로 들고 갈까를 여러 번 고민했다. 백화점에 가서 번듯한 선물을 살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에, 볼품은 없을지 모르지만 내 정성을 담을 수 있는 선물을 생각해봤다.

생각 끝에 택한 선물이 과수원 사과다. 교외에 있는 과수원을 찾아가 정성껏 골라 엉기성기 엮은 대나무 광주리에 담아 들고 갔다.

내 정성과 발품을 담은 선물을 선배 교수님은 반갑게 맞아주었다. 일주일 뒤에 다른 일로 다시 방문하게 되었는데, 내가 드린 사과 광주리가 마루 한 편에 그대로 남아있다.

내가 그 광주리에 눈길이 가자 사모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직도 저런 선물을 들고 오는 촌스런 사람이 있다.”고 웃으셨다.

나는 뜨끔했다. 내가 정성 드려 갖고 온 선물인데 사모님은 그것도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다. 젊었을 때의 좁은 소견이라 그랬는지 나는 그 일이 있고부터 그 선배교수님 댁에 인사를 갈 때 선물은 들고 가지 않았다. 사모님이 무심히 하신 그 말씀 하나가 독화살이 되어 내 가슴에 꽂혔기 때문이다.

선배교수님이나 사모님 모두 성품이 남을 일부러 폄하하는 분들이 아닌데 왜 그런 말씀을 했는지 모르겠다.

선물이란 남에게 물품을 선사하는 것이다. 물품이나 물건 아니면 돈도 마찬가지다. 요즘 선물 때문에 다툼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특히 정치권에선 선물하면 억대다.

이런 선물을 두고 너무 말이 많으니 소위 김영란 법이란 것이 제정되어 선물의 양적한계를 기준 삼은 것이다. 법률적인 중요 쟁점은 ‘대가성’이 있느냐 없느냐를 놓고 법리적 논쟁을 벌인 끝에 무혐의 또는 무죄로 판결되는 경우가 많다.

국민적 법 감정과는 거리가 먼 판결들이 많다. 오로지 교묘한 법리 논쟁의 결과다.

심리학적 의미에서 보면 선물이란 어떤 선물이던 간에 대가성이 있다. 선물은 고맙다고 드리는 선물이 있고 앞으로 잘 봐달라는 의미를 담은 선물도 있다.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 이웃에게 보내는 정성이 깃든 선물도 지금과 같은 서로의 관례를 잘 유지해 나가자고 드리는 선물이다.

이렇게 보면 대가성이 없는 것은 없다.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선물이란 대가성을 전제로 한다.

 

“선생님은 넥타이가 그것 하나밖에 없나요?“

아침 집단치료시간에 참여한 한 환자가 나에게 볼멘소리를 한다. 이 환자가 나에게 이런 볼멘소리를 하는 데는 이런 뜻이 숨어있다.

이 환자는 증상이 호전되어 외박을 다녀왔다. 외박을 다녀오면서 넥타이 7개를 나한테 선물했다. 내 짐작에도 매일매일 새로운 넥타이로 갈아 메고 오도록 1주일분 7개를 선사한 것이다.

나는 평소 넥타이를 잘 메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만 남기고 모두 남자 간호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를 알아차린 환자의 목멘 소리다. 넥타이란 와이셔츠를 갖추어 입을 때 목에 메는 것이다.

환자는 넥타이를 내 목에 메고 자기 마음대로 당기는 상상을 했을지 모른다. 내가 넥타이를 선물했으니 인형극 하듯 당기면 오고 놓으면 가야하는 치료자쯤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무의식을 그가 인식했던 인식하지 못했던 그런 대가성이 있다는 말이다.

정신치료를 하면서 환자로부터 종종 선물을 받는다. 교과서에 보면 이런 선물도 치료에 활용하라는 지침이 있다.

정신치료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통찰치료로 지금 괴로워하는 마음은 잘못된 습관과 연관이 있다는 생각에서 그 습관의 무의식을 의식화하고 통찰시킴으로서 새로운 습관을 상기시키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지지치료로 지금의 적응습관을 더 강화시켜줌으로서 적응을 쉽도록 돕는 치료다.

이 두 가지 치료 방법에 따라 선물을 달리 활용한다.

통찰 치료에선 ‘선물’의 의미를 일깨운다. 왜 치료자에게 이런 선물을 한 것인가를 통찰시킨다. 이런 통찰은 환자의 잘못된 습관을 통찰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지치료에선 무의식을 다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선물이 통상적인 사회통념을 벗어나는 수준이 아니면 ‘감사하다’는 표현을 해준다. 지지해준다는 뜻이다.

내가 선배교수님께 선물했던 촌스런 사과를 내려놓는다. 진작 내려놓았으면 훨씬 자유롭고 즐거운 관계를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늦었지만 내려놓으니 마음이 가볍다.

생각하면 사모님이 하신 말씀은 정직하다. 이런 정직한 표현을 나는 미움과 섭섭한 마음으로 간직했다.

내가 내려놓는다는 뜻은 사모님의 그 정직한 표현을 내가 내 마음대로 해석해서 미움과 앙심을 마음속에 지녔었던 그 옹졸함을 스스로 용서했다는 뜻이다. 용서란 남을 용서 하면 반 푼어치 용서다. 내가 나를 그러한 미움과 섭섭함을 간직했던 옹졸함을 용서한다면 그것은 명실상부한 온전한 용서가 될 것이다.

온전한 용서. 바로 그것이 자유로움이다. 온전한 용서는 나이 들어야 가능한가 보다. 자유로운 노인이 되면 마음이 평화롭고 행복한 노인이 될 것이다.
 
<글 : 이근후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