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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2막-투라이프

[자투리경제] "인생 2막에서는 재미있는 일을 하세요"…손장환 도서출판 리사 대표

 

 

가정도, 정의로워야 바로 섭니다. 가정에서부터 옳고 그름을 제대로 판단해야 합니다. 가족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부모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 건 가정을 바로 세우는 게 아니에요. 가정이 바로 서려면 가족끼리 화목해야 하지만 이와 더불어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결정이 정의로워야 합니다.”

 지난봄 인생의 후배들에게 주는 부부 참고서를 자임한 책 <느림보 토끼와 함께 살기>를 직접 써 펴낸 손장환 도서출판 리사 대표는 가정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명제에 동의한다며 마찬가지로 결국 가정이 정의로워야 나라도 정의로워진다고 주장했다.

 극단적인 케이스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몸담은 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에게 시험문제와 답안을 유출했다면 그건 가족을 위하는 게 아닙니다.”

손 대표는 1986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주로 스포츠 기자로 일했다. 스포츠부장을 거쳐 부국장을 지낸 후 JTBC 개국 멤버로 참여, 보도국 문화스포츠부장 겸 행정국장으로 있었고 중앙일보 단행본 법인 중앙북스의 상무로 일하다 퇴직했다. 퇴직 후 1년 간 미국 횡단 드라이브를 했고, 성경을 세 번 통독했다. 이 두 가지는 그의 버킷 리스트에 들어 있었다.

  그 후 형이 오너인 무역회사에 감사로 있다 지난봄 출판사를 차렸다. 환갑을 맞아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로 책 쓰기를 골랐고, 출판 경험을 살려 아예 나 홀로 책 만드는 1인 출판사를 차린 것이다.

  “‘배운 도둑질인 출판 사업을 하고 싶었다기보다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첫 직장에서 줄곧 기자 생활을 했지만 초짜작가의 소설을 출판사가 선뜻 내줄까 싶었죠. 주변에서 첫 책은 리스크가 크니 가볍게 쓸 수 있는 책에 도전해 보라고 해 에세이집을 냈습니다. 앞으로 5년 간 해마다 소설책 두 권을 쓰는 게 잠정적인 목표입니다.”

  작가가 되기 위해 편집 능력을 살려 소자본으로 출판사를 창업했다는 이야기다. 그랬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1인 출판을 권하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리사라는 상호는 빛과 소금(Lights and Salt) 영어 표기에서 앞쪽 두 글자씩 따왔다. 리사는 둘째 딸의 영어 이름이기도 하다.

  # 매년 소설책 두 권씩 쓰겠다

  그는 인생 2막을 시작하면서 5년 간 매년 소설책 두 권씩 내는 것을 자신의 버킷 리스트에 올렸다. 두 권은 주제와 구성까지 결정해 놓았다. 얼마 전엔 마카오로 취재 여행을 다녀왔다. 30년 가까이 몸담았던 중앙일보의 광고주가 되는 것도 버킷 리스트에 있었는데 첫 책 광고를 실어 이 꿈도 이뤘다. 아내가 교직에서 퇴직하면 1개월~3개월씩 해외에서 살아보는 장기 여행도 해 볼 생각이다. 체코 프라하는 한 달, LA는 석 달을 구상하고 있다. 그는 딸딸이 아빠다. 딸들은 아빠의 책을 읽고서 절반 이상이 이미 아는 이야기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는 자녀 세대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덧붙였다.

  "그 중엔 숨기고 싶었던 것도 있고, 반면교사적인 것도 있어요. 다른 부부는 위기가 닥쳤을 때 어떻게 극복했는지 들여다보는 건 도움이 됩니다.”

    # 취직한 딸에게서 하숙비 받아

  미국에서 대학원 공부를 하는 그의 큰딸은 학비, 기숙사비, 생활비를 스스로 조달한다. 사회 초년생인 둘째 딸은 하숙비 격으로 월 20만 원씩 낸다.

  대학 학비까지만 책임지기로 부부가 합의했습니다. 대학 진학률이 40%에 못 미치는 덴마크는 고교 졸업 후 부모 집에 살 때 대부분 하숙비에 해당하는 돈을 부모에게 드리더라고요. 이 이야기에 꽂혀 아내와 의기투합해 일찍이 두 딸에게 선포했죠. 이럴 땐 부부가 죽이 척척 맞습니다.”

  그는 부부도 우리 강산처럼 살아가면서 사계절을 겪는다고 말한다. 사계절의 변화를 견디면서 부부 관계가 튼실하게 익어간다는 것이다. 그 자신 혹독했던 겨울을 두 번 겪었다고 말했다. 첫 위기는 결혼 후 4년 만에 아내가 큰애를 안고 친정으로 갔을 때였다. “부부가 같은 방향을 바라봐야 하는데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어머니의 시선을 좇아 아내를 보고 있었습니다. 아내 편이 아니었던 거죠. 그 뒤로는 아내의 편에 서서 어머니에게 그렇게 하지 마시라’, ‘이번 일은 어머니가 잘못하셨다고 직언을 했습니다.”

  그는 시대가 바뀌었지만, 여전히 남자의 어머니는 내 아들만큼은 대접받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젖어 여자이지만 남자 편에 서기 쉽다고 말했다.

  두 번째 위기는 그가 신문사 시절 1년간의 미국 연수를 마치고서 가족을 두고 단신으로 귀국한 후 찾아왔다. 아내는 그의 뜻에 반해 미국에서 두 아이와 1년 더 지내겠다고 했다. 그 바람에 그는 10개월간 본가에서 기러기 생활을 해야 했다. 아내는 수시로 전화를 걸어 하소연했다. “내가 지금 애들 데리고 혼자 고생하고 있어. 그거 알아요?” 아내가 귀국하자 본가 식구들이 안 돌아올 줄 알았다느니 미국에서 좋았을 텐데 오면 고생이라느니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그 후 경단녀였던 아내가 중등교사 임용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사립 고등학교 보건교사 출신인 그의 아내는 첫애를 낳고 육아를 위해 학교를 그만뒀다. 살림을 병행하느라 삼수 끝에 합격한 아내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사실 나 당신과 이혼하려고 임용시험 준비했던 거예요. 경제력이 있어야 독립을 할 수 있죠. 그런데 이제 이혼할 생각 없으니 걱정 말아요. 이혼할 각오로 정말 독하게 공부했으니까 합격한 거지.”

  이혼을 결심하고 번복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혼자 아이들과 타국에서 떨어져 지내는 동안 제가 자기편이 아니라는 생각을 아내가 심각하게 한 겁니다. 실제로 제가 본가에서 지내다 보니 혼자 고생하는 아내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 못했어요. 다시 어머니 편이 된 셈이죠.”

  그는 만일 아내가 첫해나 이듬해 임용시험에 합격했다면 이혼을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털어놓았다.

  “3년간 시험 준비를 하면서 과거 남편과 떨어져 혼자 지내느라 자신이 너무 심각했었다고 생각한 거 같아요. 어쨌거나 이혼을 고려 중이라고 얘기했다면 제가 저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노력했거나 문제의 해결책을 찾았을 텐데, 여자는 남자와 참 다른 존재입니다. 남녀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남녀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만 해도 많은 갈등이 해소되죠.”

  # 부부 사이에 이심전심이란 없다

  부부는 일심동체도 아니지만, 이심전심-대화 없이 마음만으로도 통하는 사이도 아니다. 그는 공통 화제가 많을수록 부부가 해로할 가능성이 커지는 거 같다고 말했다.

  부부가 말을 꼭 많이 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해로하려면 우리는 한편-원 팀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돼요.”

  양성평등주의자인 그는 사윗감에 대해 두 가지 기대를 밝혔다. 자신의 가족과 종교가 같았으면 좋겠다는 것과 나쁜 남자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쁜 남자란 권위주의적이거나 타인을 함부로 대하는 남자를 말합니다. 이런 남자는 배우자를 존중하지 않고 자기에게 맞추려 들 가능성이 크죠. 우리 딸들도 그런 남자를 짝으로 고를 거 같지는 않아요. 가정은 부부가 우선이어야 합니다. 이 원칙을 지키면 고부 갈등, 장모·사위 간의 장서(丈壻) 갈등 등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는 젊은 부부에게 시드머니의 중요성을 기억하라고 강조했다.

  부부간의 많은 갈등이 경제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쓰고 남으면 모으겠다고 마음먹으면 시드머니 마련은 거의 불가능해요. 결혼이라는 출발선에 섰을 때 돈이 없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는 은퇴하면 부부가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지는데 자칫 부부 사이가 더 멀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삼시 세끼를 집에서 먹는다고 삼식이 새끼취급당한다는 생각이 쌓이면 부부가 서로 반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부가 함께 밥상을 준비하고 일주일에 한 끼라도 남편이 아내를 위해 상을 차린다면 가정이 화목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퇴직 후 요리에 관심을 가진 덕에 볶음밥, 김치찌개, 어묵탕, 오므라이스, 오이소박이, 감바스 알 아히요 등은 아내보다 잘 만든다. 아내와 함께 식탁을 준비하고 설거지도 함께한다.

  같이 하니 아내가 설거지 시간도 기쁘다고 합니다. 주방에서도 사랑이 싹트는 거죠.”

  젊은 남자들을 향해서는 아버지 세대에 비해 불이익을 당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 있겠지만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여전히 남자들에게 유리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세대를 막론하고 남자들이 지금까지 누려온 기득권을 더 내려놓아야 합니다. ‘지금도 아내에게 기죽어 지내는데 뭘 더 내려놓으라는 거냐고 할 사람도 있겠죠. 개인차가 있겠지만 우리 사회 전체가 그래야 한다고 저는 봅니다.”

  그는 칠 남매 중 여섯째다. 중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외벌이를 했고, 어머니는 그 수입으로 자식 일곱을 모두 대학에 보냈다. 세 남매가 대학생인 시절도 있었다. 그는 기적이 따로 없다고 말했다. 그러느라 생활력이 강했던, 돌아가신 어머니는 돈을 빌릴 만한 곳엔 모두 손을 벌렸고 식구들은 한동안 궁핍한 생활을 했다.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았지만, 그에게도 아픈 기억이 있다. ‘시대가 바뀌어 취직을 하더라도 석사 학위 정도는 있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논문을 못 쓰고 수료에 그친 일이다.

  하루하루 충실히 살겠다는 게 저의 좌우명입니다. 역사가 매일의 기록이듯이 미래도 매일의 축적이죠. 그런데 대학을 마친 후 뚜렷한 목표의식 없이 타교 대학원에 진학했다가 논문계획서 발표 때 깨지고는 그만 자포자기하고 말았습니다.”

  그에게 장차 묘비명을 어떻게 새기고 싶은지 물었다.

  일과 놀이를 적절히 병행한 사람이요. 일을 열심히 했고 열심히 놀기도 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다만 수목장을 할 거라 묘는 따로 만들지 않을 겁니다.”

  <: 이필재 인물스토리 텔러>